요즘 휴대용 화장지를 건네면서 지하철 등 번화가에서 전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노인들입니다. 인생의 끝을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하시는 말씀이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말보다는, “예수 믿고 (축)복 받으세요.” 라는 멘트를 더 많이 하십
니다.
물론 통계에 의하면, 원색적인 복음인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대속으로 죄 사함 받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선포할 때보다, 인간의 필요를 먼저 채워준 다음, 나중에 근본적인
복음을 전할 때 전도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인간의 필요를 추구하는 복음을 전하다 보면 자칫 기독교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한다.’는 샤머니즘의 종교인가 하며, 불신자들이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하다보면, ‘과연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
를 훑어보면 성도들이 로마의 네로 황제의 핍박을 이겨냈던 1세기 이후, 4세기경에 기독교의 거장 어거스틴 시대에는,
지금같이 영화관이나 대중음악 콘서트장이 없는 대신, 각종 서커스 공연이 주를 이뤘는데, 여기에 영혼을 빼앗겨서 교회
를 떠나게 된 성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후예인 영국의 청교도들이 로마 카톨릭의 환난을 칼로
싸워 이겨낸 이후, 영국 기독교는 18세기에 성도들이 술 취함으로 교회를 많이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한 대 각성 운동을 맞아 대 부흥을
경험했지만,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부적절한 연극이 성행함으로서 쾌락에 빠져,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잃고 말았습니다.
고대시대와 근세시대 그리고 근대시대를 살펴보았는데, 현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더욱더 엄청나다
는 것을 나열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사복음서, 바울서신 가릴 것 없이 신약에 많이 수없이 나와 있습
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는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
을 기뻐하노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대한민국도 현재 휴전 중이며, 중동지역에서는 끊임없이 불협
화음이 들리며, 유럽 곳곳에서는 이슬람 테러가 주요 도시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막론하고, 평화가 오랫
동안 지속됐던 시기가 별로 없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제국), 팍스 브리태니카(영국),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그리고 요
즘의 팍스 시니카(중국). 여기서 팍스(pax)는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데, 더 자세한 의미는 ‘전쟁이 없었던 고요한 시기’라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적은 눈에 꼽을 만큼 거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도 결코 놀이터가 아니요, 생존 경쟁의 시대인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부
로 쾌락을 누리며 살아도 되겠습니까?
한국은 현재 휴전중이지만, 이제 세계 15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서 마지막 때에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서민경제는 어렵다고 하지만, 선직국이므로 누구나 다 고가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며, 가끔씩 굶을지언정 술 마시고,
노래방을 드나들며, 심하면 춤추러 가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 신촌에서는 여름에
거리에다가 기다란 대형 워터파크를 설치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들 마냥 노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요즘에는 미국의
무속문화인 핼러윈데이 문화를 상품화시켜서 곳곳마다 젊은이들의 정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저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16살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
단체로 술자리에 가본적도 없고, 술에 취해본 적도 없습니다. 노래방은 취미 삼아볼까 간 적은 있었지만, 현재 제 나이
36세 인생에서 70회 미만으로 드나들었으며, 클럽이나 나이트 같은 데는 구경도 못해봤습니다. 게다가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현재 큰 연단 중에 있는데, 여자 친구도 한 번도 사겨본 적이 없고, 이성과 개인적으로 밥을 먹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친구들과 밥을 사먹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젊을 때 이성교제도 건전하게만 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가실지도 모르는 시기에 자기 자신의 행복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선교사,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목회자나 교역자의 소명이 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란 말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를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당회장 목사님이신 김덕겸 목사님은 일주일은 ‘월화수목금예주’라고 표현하시는데, 이것이 아주 정확하다고
봅니다. ‘주’는 모두 다 아시겠지만, 주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는 무엇일까요? 안식일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토요일
이란 뜻입니다.
교회마다 공 예배 횟수가 다르겠지만, 보통 월요일, 화요일 정도만 빼고는 크고 작은 예배가 다 있습니다. 예배 횟수를
채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요즘 대부분 교회에서 주일에 저녁예배가 없어지는 시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많습니다.
인생이 다양한 환경 속에 있고, 돌발적인 예외적인 경우에 있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특히 육체적, 정서적으로 너무 고단
한 성도들은 특별히 쉼을 허락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장애인들은 인터넷설교로 예배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만 육체적, 정서적으로 건강한 성도들은 교회에 더욱 분발해서 목사님을 위해, 교회와 나라를 위해, 가정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죽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런 찬송가도 있지 않습니까? “어둔 밤 쉬 내리니, 네 직분 지켜서~. 할 수만 있는 데로 힘써 일하라~.”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건강한 이 순간에 절대 방심하지 말고, 힘써서 자신의 교회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교회 성도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