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관한 장입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수많은 증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된
축복을 받은 증거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중생의 믿음이 생긴 이후에,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쉬운 길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을 테스트하시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과
다른, 광야 학교에 입학하게 하시며,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걷게 하십니다.
한국 교회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일제치하와 6.25를 겪고 난 당시의 대한민국은 심령과 물질적으로 가난할 데로
가난해져, 인간적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는 '예수 믿으면 미국
사람들 같이 굶을 일 만은 없을 것이다.' 라고 믿으며, 국가 경제 발전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기복적인 신앙
으로 하나님의 복을 찾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심지도 않는 참새도 먹이시지만, 우리 한국의 기복적 믿음의
단순한 기도도 들으시기도 하십니다. 자식을 갖을 수 없었던 한나의 순전한 기도와 수로보니게 여인의 개의 부스러기도 원한다는
절박함 같은 대한민국의 신자들을 먼저 예수의 피로 구원하셨고, 게다가 70~80년대 들어서 국가 경제 수준이 개발도상국 수준
으로 상향되어 많은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자 나라가 이전에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룬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니까, 기독교 신자들은 더 나은 번영을 위해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신자들은 성령의 열매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가 뒤따라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지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님들을 파송할 만큼 전도에 열정은 많아졌지만, 많은 목회자 분들께서 ‘영성’을 뒤로 제쳐두고, 세상에서 물질적, 명예
적으로 성공한 다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성공주의 신학이 아주 판을 치게 되었던 그 때였습니다.
2000년대는 2002월드컵을 치룬 이후 세계에서 20위 정도의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미국의 전철을 따라
교회에 세속주의가 들어오게 되며, 2007년에 형식적인 평양 대부흥 100주년 행사 마져 아주 세속적으로 치루게 됩니다.
당시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회개해야 하며 십자가와 성화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 거룩했던 설교
외에는 아주 천박한 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01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나라 경제는 50년 전에 아주 못 살았던 수준에 비하면 너무 잘 살지만, 서민 경제는 너무
힘들어졌고, 스마트폰과 첨단 기기를 이용하는 대신 개인주의가 만연해졌습니다. 이혼도 너무 잦아지며, 결혼은 하지 않는
추세가 많고, 출산율도 너무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80년대와 그 이전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던 신학과 90년대 성공주의 신학, 2000년대 교회의 세속화를 겪으면서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복음의 순수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성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보다 근본적인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첫 사랑을 감격을
회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분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과거 청교도 시절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것이 율법적인 현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회심이 없는 양적인 신자들의 확충에만 목 매달린 것이 오늘날 이렇게 부작용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초반 미국의 찰스 피니 시대부터 그러한 경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과거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 가는
것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둘째,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청교도들보다 더 근본적인 성경적 복음이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1:8절과 10:38절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기름부음, 은사)을 받아 착한 일(성령의 열매, 성화)을
행하는 것입니다. 과거 프랑스 위그노들은 성경 이후 교회사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가장 마음이 통했던 신자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정주의에 빠져있어 의지적으로는 나약했던 점이 단점이었습니다. 만약 신자들이 첫 사랑의 기쁨과 그로 인해 매일
눈물만 흘린다면, 성령으로 주님과 교통할 수는 있겠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제자도 정신과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신자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영적 파워가 있어야 되는데,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은
나중에 따로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영력이 없이 단지 그냥 인간의 힘으로는 탈진만 하게 됩니다.
위에 언급했던 성화, 즉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보다는 더욱 더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것이며, 서두에 말했던 믿음의 여정과
함께 광야학교를 통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기도 혹은 소그룹 기도모임 혹은 은사집회에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주어지게 되는데, 주로 80%가 방언과 벙언 통역을 받게 되며, 나머지 20% 정도는 방언과 방언통역 외의 다른
은사들을 받게 됩니다. 이 역시 영력이 커짐에 따라 갑자기 혹은 점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화 과정은 아브라함, 모세, 욥, 요셉, 다윗, 바울 등과 같이 인생의 대략 인생의 1/3 정도 광야 학교의 믿음의 테스트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경우는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만 연단을 받았다고 하지만, 사도들의 인정을
받기까지의 기간은 약 10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야곱의 경우 자신의 히브리어 이름 뜻같이 ‘사기꾼’으로 살아왔지만, 인생 말미에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 총리가 된 아들 요셉에게 돌아가 험악하게 살아왔던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깨지는 일도 경험하게 됩니다.
다음 2부에서는 답답한 현실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합니다.
사랑교회 성도 김정현